(2)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의 경우
실제로 인플레이션을 완벽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대부분의 인플레이션은 예상치 못한 것이라는 성격을 갖는데, 이와 같은 유형의 인플레이션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① 소득재분배 효과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은 여러 사람 사이에서 뜻하지 않게 소득이 재분배되는 결과를 빚는다. 그 좋은 예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소득재분배 효과다. 물가상승률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경우 이자율을 적절하게 조정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채무자는 이득을 보고 채권자는 손해를 보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고정된 명목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기업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정된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 명목가치가 고정된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② 장기계약의 문제
앞으로 인플레이션이 어떤 속도로 진전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어떤 방향으로 소득의 재분배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장기계약이 맺어지기 힘들게 된다. 장기계약을 통해 돈을 빌려주고 받는 경우에는 물가상승률이 조금만 달라져도 매우 큰 폭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발생한다. 말하자면 장기계약에 따른 위험이 상당히 크다는 것인데, 이런 이유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장기계약을 회피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금융기관과 기업이 모두 단기계약을 선호해 단기대출만 이루어지고 장기대출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경제 전반의 효율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때로는 기업이 긴 안목에서 장기 투자계획을 실행에 옮길 필요가 있을 텐데, 장기대출이 불가능해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면 기업들은 머지않아 경쟁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③ 투기의 성행
인플레이션하에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똑같은 비율로 오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이 빠른 속도로 진행할수록 각 상품 사이의 가격 상승률 격차가 더욱 커지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상치 못한 데다가 빠르게 진행하는 인플레이션하에서는 상대가격에 매우 큰 변화가 생긴다는 말이다.
상대가격에 변화가 오면 이로부터 어떤 사람은 이득을 보는 한편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는 소득재분배 효과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금값이 유독 엄청나게 뛰면 금을 가진 사람은 이득을 보지만 금을 사서 써야 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게 된다.
상대가격 변화가 어느 방향으로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로 인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어느 방향으로 작용할지도 예측하기 힘들다. 즉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의 소득재분배 효과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인플레이션의 진행 속도가 빠를수록 상대 가격의 변화폭이 큰 것이 일반적인데, 이에 따라 소득재분배 효과가 더 커질 뿐 아니라 그 효과의 불확실성도 커진다.
나아가 상대가격의 변화가 심해지면 가격이 더 많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품, 예컨대 부동산, 골동품, 금, 외환 등에 대한 투기가 성행하게 된다. 사회 전체에 투기가 만연하게 되면 건전한 성격의 투자는 이루어지기 힘들어지고, 이에 따라 매우 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상대가격의 변화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각 상품의 가격이 똑같은 비율로 올라 국내의 상품들 사이에서 상대가격이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외국 상품에 비해 국내 상품이 상대적으로 더 비싸지기 때문에 수출의 감소와 수입의 증가를 유발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플레이션이 단기적인 국제수지 적자의 요인이 된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문제는 예측된 인플레이션의 경우에도 역시 발생하게 된다.
# 세상의 갖가지 인플레이션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플레이션이란 것은 상품들의 가격이 지속해서 올라가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다른 데서도 어떤 것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012년 4월 7일 자 The Economist 지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소개되어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첫 번째 사례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특정 사이즈의 옷 치수가 계속 커져 온 '사이즈 인플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팔리는 여성 바지 사이즈 14의 실제 허리들에는 1970년대에 비해 거의 10센티 이상이 더 커졌다고 한다. 즉 1970년대라면 사이즈 8로 표시되었어야 할 여성 바지가 오늘날은 사이즈 14로 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고 한다.
옷 제조업자들이 이와 같은 사이즈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옷을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래 사이즈 18의 큰 옷을 입는 사람이 날씬한 사람들이 입는 사이 14가 자신에게 맞는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 기분이 좋을 것은 물론이고, 따라서 그는 흔쾌히 지갑을 열게 된다. 옷 제조업자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사이즈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인플레이션 현상은 여행업계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별 다섯개짜리 호텔이라면 최고급의 호텔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요즘에는 별 여섯 개짜리, 심지어는 일곱 개짜리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호텔 등급의 인플레이션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호텔의 방도 예전에는 Deluxe room이라면 가장 좋은 방을 뜻했지만, 요즘은 일반적인 방도 이런 이름으로 부른 다, luxury라는 표현만으로도 모자라 superior luxury 혹은 grand superior luxury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인플레이션의 사례는 성적 인플레이션이다. 영국 학교에서 25년 전에는 우수 학생 중 A등급을 받은 비율이 9%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비율이 27%로 급증했는데, 실제로 학생들의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A등급이 1980년대의 c등급에 해당한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의 성적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셈이다.
미국 대학에서도 학점 인플레이션이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대학 졸업생 중 최상위등급으로 졸업하는 사람의 비율이 1960년에는 15%였던 것이 이제는 45%로 세 배 수준으로 치솟았다. 좋은 학점으로 졸업하는 학생들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학점 인플레이션은 열심히 노력하는 한 학생들에게 불공평한 일일 뿐 아니라, 기업이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어느 종류의 인플레이션이든 간에 정보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행동을 왜곡한다는 문제점을 갖는다. 옷의 사이즈 인플레이션은 사람들에게 더 날씬한 체형을 갖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게 만든다. 학점 인플레이션이 더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도 부정하기 힘들다. 앞에서 예상된 인플레이션의 경우라 하더라도 경제주체의 의사결정에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계산단위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한 바 있다. 지금 예로 들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름대로 모두 계산단위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는 셈이다.
옷을 더 팔기 위해, 호텔에 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해, 혹은 학생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일으킨 인플레이션이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경제학에서 배우는 인플레이션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인플레이션이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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